꿈동
가바새
- 시인은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에 대해 연신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서 환희의 기분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엔 소멸되고 말 거라는 생각, 겨울이 오면 그 자연의 아륻마움도 사라지고 없을 거라는 생각에 착잡한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프로이트의 ‘덧없음’-
그나 그렇다고 해서 슬퍼만 하는 것이 옳은가, 하고 그는 반문한다. 오히려 그 덧없음으로 인해 아름다움의 가치가 더 증대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사건은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사건, 해석, 진실, 단절로 이어지는 과정, 단편은 대개 그 깨달음의 순간에서 멈추지만 장편에서는 되돌릴 수 없는 진실에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실존적 단절이 시도되기도 한다.
- 작가를 운자에 비유할 수 있다면,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유려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운전자가 있고, 우리가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운전자가 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이 서로 교감하고 연대하기를 바라는 것이 전자의 염원이라면, 이야기라는 장치를 의심해야만 이 세계를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 후자의 전언이다.
- 소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실존의 어떤 가능성”을 탐구해보는 장소다. 소설은 실험실이고 작가는 실험한다.
- 로버트 펜 워런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 인간은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좀 더 좋아질 거라는 믿음. 문학은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 내게 작품의 깊이란 곧 ‘인간 이해’의 깊이다. 인간의 무엇을? ‘타인의 고통’을.
- 세상에는 아주 드물게도 고통이 더 많은 쪽으로 가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 ‘예술은 현실의 재현’. ‘재현’이란 현상의 복사가 아니라 본질의 장악이다. 남길 것과 지울 것을 선택하는 지성이 필요한 일이다. 또 독자에게 고통을 전이시켜야 한다.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인지의 충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가장 성공적인 질주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조차도 가끔 이런 의문에 걸려 넘어진다. ‘진정한 삶’을 사유한다는 것은 곧 ‘삶의 의미’를 사유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문학은 질문이다.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 지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건 당신은 바뀌어야 한다.
- 그녀를 만난 후에야 고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토니 다키타니-
- ‘결여의 교환’. 누구나 결여를 갖고 있다. 부끄러워서 대개는 감춘다. 내가 아니면 그의 결여를 이해할 사람이 없다 여겨지고, 그야말로 내 결여를 이해해줄 사람으로 다가온다. 있다면, 바로 그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더 온전해진다.’
- 개인의 고유성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와 어법에서도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