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녕 (체커)
꾹꾹
- 세계는 한번의 대폭발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서서히 빛을 잃고 흐트러지면서 점차 허물어진다. 무엇이 파멸을 야기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멸의 원인은 먼 과거에 어떤 악한 존재의 변덕처럼 보일 만큼 현재와 절대적으로 동떨어진 과거에 놓여있다. -13p
- 이점에서 자본주의는 존 카페넡의 영화 괴물에 나오는 그 사물, 접촉하는 것마다 흡수하고 소화하는 무시무시하며 무한히 유연한 어떤 실체와 매우 유사하다. -18p
- 만일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환영이 지식속에 있는 것이라는 고전적인 개념에 머문다면 분명 오늘날의 사회는 포스트이데올로기적으로 보일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 진실을 믿지 않으며 이데올로기적 명제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으로 사물들의 실상을 은폐하는 환영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무의식적)환상 수준에 있다. 그리고 이 수준에서라면 우리는 물론 포스트이데올로기적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냉소적인 거리 두기는 단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지니고 있는 구조화하는 힘에 눈을 감아 버리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리 아이러니한 거리를 유지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31p
- 그토록 많은 사람, 특히 그토록 많은 청년이 아프다는 사실을 어떻게 용인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신 건강 질환’이 유행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사회체계이기는 커녕 내재적으로 고장 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하는 듯이 보이도록 만드는 비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42p
- 내가 만난 10대 학생 상당수는 내가 우울증적 쾌락이라 부르는 상태에 빠져있는 듯 보였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을 특징짓는 것은 무쾌락 상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상태는 쾌락을 얻지 못하는 무능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생들은 무언가가 빠져 있다고 느끼지만 오직 쾌락원칙 너머에서만 이 누락된 불가사의한 향락에 접근할 수 있음을 감지하지는 못한다. -45p
- 충분한 것으로는 더 이상 충분 하지 않다. 수행 평가의 양호 등급이 계속 양호하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고 있는 숱한 노동자에게 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가령 수많은 교육 제도에서 어떤교사가 수업 관찰 후 ‘양호’로 평가되었더라도 그는 다시 평가받기 전에 연수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72p
- 우리는 관료주의적 리비도, 즉 특정 공무원들이 책임을 부인함으로써 얻는 그 향락에 아주 익숙하다. 관료들을 대할 때 겪는 좌절감은 종종 그 관료들 스스로도 아무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에서 유발된다. 이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언제나 이미 (대타자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 결정을 언급하는 일뿐이다. -86p
- 사람들에게 어떻게 체중을 줄이고 어떻게 집을 꾸며야하는지 말하는 것은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모종의 문화적 개선까지 요구하면 그것은 억압이고 엘리트주의다. - 정말이지 문제는 특정 유형의 이해관계만이 적절한 것(합의된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는 이유로)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124p
- 어떤 것도 본래 부터 정치적이지는 않다. 다시 말해 정치화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것으로 변형 시킬 수 있는 정치적 행위 주체를 필요로한다. -132p
- 포드주의 시대와 연관된 권태는 끝났습니다. 이제 그런 권태를 위한 공간은 없습니다. 스마트폰은 그런 권태가 자라날 수 있는 모든 간극을 메웁니다. 그러나 링크를 따라다니며 클릭하고자 하는 불면증적인 욕구가 곧바로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디지털 세상을 표류하는 이런 경험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분위기는 매혹과 권태의 혼합물입니다. 우리는 열광하는 동시에 권태로워 합니다. -146p
오이